독일 정치권이 국방 및 인프라 투자 예산을 두고 치열한 논쟁을 벌이고 있다. 5000억유로(약 791조원) 규모의 특별기금 마련이 추진되고 있지만, 이를 둘러싼 여야 간 이견이 좁혀지지 않으면서 예산안 통과가 난항을 겪고 있다.
차기 총리로 유력한 프리드리히 메르츠 기독민주당(CDU) 대표는 국방 예산 증액이 불가피하다며 특별기금 중 500억유로(약 79조원)를 기후보호 예산으로 배정하겠다고 제안했다. 반면 연정 파트너인 녹색당은 이를 신뢰할 수 없다며 반대 입장을 고수하고 있다.

메르츠 대표는 13일(현지시간) 연방의회에서 “독일은 방어 능력을 갖춰야 하며, 더 이상 지체할 수 없다”며 국방비 증액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이어 "인프라 기금의 일부를 기후 예산으로 활용할 수 있다"고 제안했지만, 녹색당은 이를 일축했다.
녹색당 원내대표인 카타리나 드뢰게는 “메르츠 대표의 발언을 신뢰할 수 없다. 그의 우선순위는 국가 이익이 아니다”라고 강하게 비판했다.
CDU·CSU 연합과 사회민주당(SPD)은 차기 연립정부 출범을 앞두고 10년간 5000억유로 규모의 인프라 특별기금을 조성하고, 국방비 지출을 헌법상 부채한도 규정에서 제외하는 방안을 추진 중이다.
기본법(헌법) 개정을 위해서는 연방의회 재적 3분의 2 이상 찬성이 필요하다. 현재 CDU·CSU 연합과 SPD만으로는 필요한 의석수를 확보할 수 없다. 예산안 통과를 위해서는 녹색당의 협조가 필수적인 상황이다.
반대파의 반발도 심상치 않다. 극우 성향의 독일대안당(AfD)과 좌파당은 특별예산 처리를 위한 임시 회기 개최를 막기 위해 헌법재판소에 소송을 제기했다. 오는 25일 새 의회가 소집되면 두 정당의 의석수가 개헌 저지선인 재적 3분의 1을 넘어 예산안 통과가 사실상 불가능해진다.
AfD 알리스 바이델 공동대표는 “메르츠 대표는 부채제동장치를 무너뜨린 인물로 역사에 기록될 것”이라며 강도 높은 비판을 쏟아냈다.
부채제동장치는 신규 정부 부채를 국내총생산(GDP)의 0.35% 이하로 제한하는 규정으로, 메르츠 대표는 국방비에 한해 이 규정을 예외로 적용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독일철도(DB)는 철도망 유지보수 및 디지털 전환을 위해 10년간 1500억유로(약 237조원)가 필요하다고 주장하며, 정부의 투자 결정을 촉구했다.
다만, 킬세계경제연구소(IfW) 모리츠 슐라리크 소장은 “추가 예산이 식당 부가가치세 감면과 같은 단기적 정책에 사용된다면 독일 경제 성장에 실질적인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라고 우려를 표명했다.
연방의회는 오는 18일 국방·인프라 예산안을 포함한 기본법 개정안을 표결에 부칠 예정이다. 녹색당이 끝까지 반대할 경우 개정안은 부결될 가능성이 크며, 독일 정부의 대규모 투자 계획도 좌초될 위기에 놓이게 된다.